제 747 호 제주 4.3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좌)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www.netflix.com )
(우)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사진: 문학동네 https://munhak.com/ )
지난 3월 7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가 화제다. 제주를 배경으로 애순이와 관식이의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드라마는 세대를 아우르며 공감과 눈물을 자아냈다.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로 드라마의 배경인 제주 역시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제주의 따스하고 화창한 이미지 뒤에는 잊혀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다룬 그 상처가 제주 4.3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회 삼일절 기념식 직후 진행된 가두시위 도중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경찰이 다친 어린아이를 살피지 않고 지나가자 성난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했고 경찰은 이를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의도로 파악, 군중들에게 총격을 가해 6명이 사망하고 만다. 분노한 제주 시민들은 좌익 세력인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1947년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민관합동파업을 실시하였지만, 당시 중앙정부였던 미군정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탄압하였다. 이후 고문 등을 비롯하여 가혹한 탄압이 1년여간 이어졌고, 제주 곳곳에서는 도민들을 향한 우익 단체의 지속적인 테러와 선동 행위가 벌어졌다.
극단적인 탄압으로 제주도민과 경찰 간의 대립이 심화되던 1948년 4월 3일, 이에 반발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위원회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350여 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인사 등을 습격하였고, 경찰 4명과 우익인사 8명이 사망하게 된다. 당시 5.10 총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었기에 군과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여 여러 건의 추가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무장대와 군경 사이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벌어지자 미군정은 4월 28일,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실시한다. 의견 차를 조율해 가며 협상 타결을 눈앞에 두었던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이를 무장대의 방화로 몰아갔고, 미군정은 협상 의사를 철회하고 강경 진압 의사를 표명한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결국 제헌 국회의원을 뽑는 5.10 총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무장대의 주도로 대대적인 선거 방해가 일어난다. 이로 인해 제주도 두 개의 선거구에서는 선거가 무효화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이후 미군정은 미군 대령을 파견하여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큰 충격을 받은 미군정은 제주도에 대한 토벌 작전을 펼쳐 도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자 정부는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의 군 병력을 추가 파견하여 토벌 작전을 이어간다. 지속적인 충돌과 유혈사태가 벌어지던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의 산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한다는 포고문이 발표된다. 이 시점부터 군경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1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일명 ‘초토화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토벌작전이 실시된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 또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무장대도 마찬가지였다. 해안가의 우익 중요 인사들과 군경을 토벌 목적으로 살해했다. 제주는 각 진영 간의 증오와 복수로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참혹한 사태는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발표된 뒤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한라산 지역에서 내려와 귀순하면서 끝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이 포고문의 내용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군경은 1600여 명의 사람들을 학살함으로 무장대를 사실상 궤멸시켰다. 또한 6.25 전쟁 도중 좌익 세력 색출을 목적으로 또다시 학살을 단행하였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전면 해제되고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이 체포되면서 장정 7년 7개월간 이어진 제주 4.3 사건은 확인 사망자 10,715명, 추정 사망자 3만여 명, 실종자 3,171명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8 이상이 화를 입은 아픈 역사로 남았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항공사진 (사진: 제주4·3평화재단)
군경에 붙잡힌 사람들 (사진: 제주4·3평화재단)
제주 4.3 사건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지난 3월 19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제주 4.3 사건 기록물 ‘진실을 밝히다: 제주4·3아카이브’(Revealing Truth: Jeju 4·3 Archives)’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비극 중 하나로 남은 제주4·3사건에 대한 기록들로, 기록물은 4·3당시부터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된 2003년까지 생산된 것을 포함해 모두 1만4673건에 이른다.
제주4·3아카이브에서는 메이데이로 알려진 ‘May Day in Cheju-do’- 미국(1948) 원본영상과 형무소 및 후유장애 등 주제별 증언영상과 제주MBC에서 제작한 4·3증언 나는 말한다(2001) 등 미디어 자료와 4·3관련 자료집 원문 및 4·3신문자료집 기사 검색이 가능하다. 이밖에 <난민정착 보고서>, 국가기록 자료집 등 문헌자료도 제공하고 있다.
▲제주 4.3 아카이브 시청각 자료 (사진: 제주 4.3아카이브 캡처 http://43archives.or.kr/data/getRecord.do?record_no=6095 )
지난 4월 11일유네스코집행이사회에서 제주 4.3 아카이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결정되었다.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으로써 광주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처럼 4·3기록관(가칭)이 건립될 것으로 보인다. 4·3기록관에는 전시관과 도서관 등이 설치되며 현대사의 큰 비극인 제주 4.3 사건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제주 4.3 사건,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
지난 4월 3일, ‘제77주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이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사건 생존자와 유족 등 약 2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이날 추념식에 참석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앞으로도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완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밝히면서 추가적인 진상조사를 올해 안에 마무리할 것을 약속했다. 이 외에도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려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 지난 3월 29일 열린 ‘전국 대학생 4.3 평화대행진’은 미래 세대가 평화와 화해의 가치를 이어가기 위한 행사로, 전국 23개 대학이 참여하여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게 이어갈 의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은탁 기자, 박찬웅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