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5 호 [책으로 세상 보기]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사진: https://images.app.goo.gl/oDmkR4Exy7k4RZ156) 오늘날 혐오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이러한 혐오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산되는지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이 책의 저자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문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인물인 윌리엄 헤즐릿(William Hazlitt)이다. 그는 인간 본성과 감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사회적·정치적 문제와 연결하는 에세이로 명성을 얻었다. 헤즐릿은 감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시각에서 심리를 탐구하며, 이 책에서도 혐오라는 복잡한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서 어떻게 즐거움과 결합하여 확산되는지를 분석한다. 책은 혐오가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때때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고 배제할 때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고 말하며, 혐오가 공동체적 결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혐오의 감정이 정당화될 때,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당연시하게 되며, 이는 더욱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특히 이 책은 혐오가 사회적 갈등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정치적 이념, 인종, 젠더, 계급 등 다양한 영역에서 혐오는 갈등을 부추기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저자는 “혐오는 단순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이용된다”고 말하며, 혐오가 권력 관계와 맞물릴 때 더욱 깊은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를 조장하거나 이용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혐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혐오를 단순히 억제하거나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혐오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사회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해야 하며, 혐오의 즐거움을 넘어 더 나은 사회적 유대와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혐오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심리 자체를 이해하고, 그보다 더 강한 결속과 연대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혐오를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적·심리적·문화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혐오의 작동 방식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은민 기자
제 745 호 [교수사설]상명인을 위한 조언
대학 캠퍼스의 3월은 싱그럽다. 교내 이곳저곳에 생기가 돌고 여기저기서 맑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힘차게 열어젖힌 신입생들이 들어왔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고,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야 될 ‘관록’의 4학년에게서 다부진 결기가 느껴져 더욱 그렇다. 대학을 졸업한 많은 사람들은 '그 좋던' 대학시절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그 좋은' 시절을 보낼 대학생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전한다. 첫째 학교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 되기를 바란다. 수업은 대학생에게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훌륭한 기회이다. 과거에는 교수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지식이 교수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손에 의해 작성된 판서를 통해 전달됐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다. 과거와 비교해 매우 짧은 시간에,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판기를 두드려 확보한 정보는 지식이라 부르기 힘들다. 읽고, 듣고, 생각한 정보들이 지식으로 축적된다.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고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또 대학에서는 지식습득만이 전부는 아니다. 리더십도 기르고 협동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별 과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수업 시간에는 필사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잡고, 매주 20시간 이상 지식을 쌓기 바란다. 둘째 교제의 폭을 최대한 넓혀라. 교내에서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동료를 적극적으로 찾아라. 단 세명의 사람이 모여도 그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하물며 상명대의 수많은 전공과 입학생들의 다양한 출신 지역을 생각하면 ‘도처에 사부가 널려있다’ 할 수 있다. 아직은 미숙하더라도 전공이 다르면 관점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 그 속에서 몰랐던 사실과 진실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 가급적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라.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동료와 선배와 후배를 만나라. 때로는 술 한잔도 하시라. 한주에 보낸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운동을 시작하라.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본인이 잘하는 운동과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으면 된다. 운동은 만국의 공통어다. 특히 외국에서 친구를 사귀든, 비즈니스를 하든, 아니면 그저 여행을 하든, 서먹함을 없애는 데는 운동이라는 소재가 최고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과는 ‘정치와 종교’ 얘기는 금물이다. 만일 좋아하는 팀이 같다면 밤새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땀 흘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이 최고 아닌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라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넷째 패기와 배짱을 가져라. 달리 말하면 실패할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라. 경험이 없기 때문에 늘 새롭게 도전하기 마련이고 실패는 불가피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서툴고, 실패를 해야 배우는 것이 많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경험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실패 의 역설이라고 할까. 뻔뻔할 만큼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마라. 대학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다들 아름답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실은 옹색할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 보이고 빈곤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불안 속에 희망을 꿈꾸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문이 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문은 꼭 두드려야 열리는 것만은 아니다. 꿈을 꿔도 열린다.
제 745 호 [교수칼럼]사라져가는 단어들, 머릿속 사전에 등재하자
방송에서 고등학생들의 문해력을 테스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제시된 단어를 설명하고 다른 학생이 맞히는 게임이었다. ‘존함’이 나오자, 난감한 표정의 학생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주 큰 함성’이라고 설명했다. 비속어인 ‘존’과 ‘함성’의 첫 글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영상을 지켜보던 출연자들의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낯선 단어를 접했을 때의 해석 방식과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휘력 부족으로 인한 문해력 저하는 뉴스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는 문제이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하여 과제를 제출하지 못했다거나, ‘중식(中食)’을 ‘중국 음식’으로 오해하여 한식으로 제공해 달라고 항의했다는 사례, ‘심심한 사과’에 대한 논란 등은 문해력 저하의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고지식(하다)’를 ‘높은 지식’으로, ‘선무당’을 ‘서 있는 무당’으로, ‘사흘’을 4일로 오해하는 등 청소년들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발생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매우 ‘충격적’이라고 다루고 있는 청소년들의 어휘력 문제는 현재의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될까?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기성세대는 언제쯤 저런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익혔을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심심하다(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난감하고 이상한 말이었다. 옆집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를 여읜 아저씨에게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느릿느릿하고 낮은,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심심한 위로를 전하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나도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라니! 위로는 왜 또 ‘심심하게’ 하신단 말인가?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시면서 왜 위로는 심심하게 하실까? ‘심심하다’를 ‘싱겁다’로만 알고 있던 내게 ‘심심한 위로’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난해한 표현이었다. 어휘력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뜻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나도 현재의 청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함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요즘 청소년들의 어휘력 저하를 우려하는 시각은 유효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도 가능하다.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사례 중 상당수는 사용 빈도가 낮은 한자어들이다. ‘심심한 사과 또는 위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중식’, ‘금일’ 같은 단어들도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를 모르는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현대의 언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수십만 개에 이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쓰였으나 현재는 쓰이지 않는 죽은 말, 즉, ‘사어(死語)’, ‘폐어(廢語)’, ‘유령어(ghost words)’가 된 표제어도 많다. ‘기적(汽笛) 소리’를 ‘기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소리’라고 설명한 학생처럼, 일부 단어들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시대적 변화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단어를 익히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세상에 몰라도 되는 단어는 없다. 하나의 단어를 아는 것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휘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독서와 경험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단어를 접했을 때, 단순히 뜻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까지 파악해야 한다. 단어를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쓰는 연습도 해 보자. 어렵고 어색했던 단어가 머릿속 사전에 자리 잡으며 생명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사라져 가는 단어라 할지라도 머릿속 사전에 등재해 두면 언젠가 적절한 순간에 빛나게 사용할 수 있다. 어휘를 확장하는 노력은 우리의 사고력을 깊게 하고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며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계당교양교육원 방영심 교수
제 744 호 [교수칼럼]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
올해 겨울은 날씨의 변동성이 유난히도 큰 것 같습니다. 이 원고를 작성하는 2월 7일 현재, 서울 종로구의 기온은 –9도입니다. 그리고 체감온도는 더욱 낮습니다. 어젯밤에는 소복이 큰 눈이 내려서, 인왕산 주변과 캠퍼스 곳곳이 눈꽃으로 가득합니다. 지난해 말 확인한 기상 예보에서는 올겨울이 평년보다 따뜻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보와는 달리, 2월 들어 날씨의 변동이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명의 교정에서 이 글을 읽게 될 3월에는 새싹이 막 돋아날 것입니다. 조만간 알록달록한 꽃들도 교정을 가득 채우겠지요. 저는 상명인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과거에 예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변화는 일기 예보와 마찬가지로, 현재 예측한 것이 실제는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상명의 학생들이 인생에서 2월을 지나 이제 막 3월에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곧 사회에서도 알록달록한 여러분만의 예쁜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이 앞으로 어떤 꽃으로, 어디에서 활짝 필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생활의 변동성이 커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올겨울, 급격한 날씨 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변화도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현재의 불확실성 속에서 움츠러든다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재가 아무리 춥고 향후 며칠 동안 맹추위가 지속될지라도, 변덕스러운 겨울이 지나면 결국 봄이 오고 꽃망울이 피어납니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고, 적절한 습도와 영양을 흡수하며, 해충과 질병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친 꽃망울은 결국 풍성한 결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상명인 여러분 중 일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매우 추운 시기이며, 앞으로 그 추위가 더욱 심해지고 주변 환경의 변화가 많아 불안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상명이라는 양질의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깨닫고 자신의 역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앞으로 마주할 어려움과 난관을 꿋꿋이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사회에서 값진 성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상명인 여러분의 앞날에 따뜻한 봄날과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유승동 교수(경제금융학부)
제 744 호 [교수사설]과거와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지난해를 돌아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만 되면 “과연 우리도 수상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그러한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된 우리는 영화·음악·드라마 등으로 대표되는 K컬처가 그저 서구문화의 모방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적 역량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국은 대륙과 섬의 중간에 자리한 반도 국가이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천 년의 역사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이 땅의 ‘서사’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정신력이다. 한강 작가가 빚어낸 ‘문학’은 이러한 역사의 상흔과 극복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언어와 인종이 다른 세계 여러 민족과 깊이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밑바탕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서사’, 즉 문학·드라마·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서사는 그 어느 한 장면도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을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그려내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들어 보면,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는 물음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돕고 있는가. 혹은 우리 대학의 과거는 현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과거와 역사는 화석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디딤돌이자 미래를 위한 도약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거를 우리가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재해석하느냐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과 학교 구성원 모두 각자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그걸 다른 말로 자신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사가 현재를 돕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려면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 그에 따른 변화가 뒤따라야만 한다. 대학은 바로 그 탐구의 장이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대학이 제공하는 지식과 환경 위에서 자신의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를 열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문명 시대에는 인간이 가진 고유한 경험과 서사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과거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학은 학생들이 과거로부터 배운 통찰을 발판 삼아 미래를 창조할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 일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봄, 새 학기를 시작하는 모두가 과거를 ‘짐’이 아닌 ‘자산’으로 삼아 한 걸음 더 미래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돕고 있는 과거의 힘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제 744 호 [영화로 세상보기] 당신은 하나다
▲ <서브스턴스> 포스터 (출처: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61579)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증오스럽고 혐오스럽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겉보기에 알 수 없는 것까지,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끼다 보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남들만큼 예쁘지 못해서, 남들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남들만큼 잘나지 못해서, 남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나라서, 그런 나라서 내가 싫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나 혼자 남아 더 이상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더 나은 모습의 ‘나’, 최선의 ‘나’가 아니기에.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렇다면 너 나은 버전의 내가 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유명한 여배우이다. 시간이 지나 50세가 된 엘리자베스는 퇴물 취급을 받으며 오랫동안 진행해 오던 TV 쇼에서 잘리는 동시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배우가 된다. 나이 들어 젊고 아름답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TV에 나올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더 나은 버전의 나’가 될 수 있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투약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 젊고 아름다운 수의 몸으로 깨어난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와 수, 한 사람의 영혼으로 이상적인 두 사람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가 명세를 얻기 위해 서브스턴스 사용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서, 엘리자베스는 급속한 노화를 겪으며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결국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싸움을 벌이다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하나이다. 더 젊고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은 여성을 향한 외모지상주의, 즉 여성을 향해 던져지는 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 그리고 자신을 향한 혐오의 이유가 정말로 엘리자베스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선택한 폭력적이고 파멸적인 결말이 정말로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혐오와 선택의 기저에 사회의 시선이 투영되었고,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 욕망, 그런 내가 될 수 없어 나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기혐오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다면 그 끝에는 나, 정말로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 진정으로 나를 위한 마음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마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연 기자
제 741 호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대학의 학생회는 학생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대학 구성원의 한 축으로서 학교와 학생들의 사이를 잇는 중요한 기구이다. 총학생회, 단과대학생회 등 학생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행사이다. 80년대 총학생회가 출범한 이후 학생회는 사회 민주화 학내민주화의 상징으로 정치적, 사회적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소위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후 운동권의 분열과 여러 상황으로 학생운동의 힘이 쇠락하면서 거대 담론이 사라진 90년대의 사회 분위기와 IMF 경제위기 이후 정치적 무관심이 가시화되면서 학생회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학생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인한 투표율 저하는 급기야 학생회 구성이 불가능할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학생활동의 중단은 학생회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 현재는 온라인 환경의 변화로 학생회라는 대의 민주제 대신 직접 민주제도 가능한 상황이 되어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희석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2025학년도 우리 대학 학생회를 이끌어 갈 학생회 선거가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서울캠퍼스는 총학생회는 입후보자를 내지 못했으나 다행히 5개의 단과대는 입후보자를 내었고 당선되었다. 천안캠퍼스는 총학생회와 5개의 단과대학 중 두 개의 단과대학에서 입후보자를 내었으나 전체 투표율 30% 미만으로 학생회 결성이 무산되었다. 이번 선거 결과로 내년도 학생 자치활동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학기에 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진다면 그나마 어려움이 덜하겠지만 온라인 투표로도 철저한 무관심을 표하고 있는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투표를 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앞날을 전망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동안 많은 대학이 학생회 입후보자의 부재와 학생회 구성의 의결정족수 미달로 기구구성이 무산된 후 학생회 활동을 비대위 체제로 대체해 왔다. 우리 대학 역시 이번 연도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 선거의 결과 내년도의 학내에 산적한 다양한 활동은 그간 해온 것처럼 비대위 활동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비대위는 그야말로 비상대책을 위한 임시기구로서 인력이나 영향력 등에서 의결권이 없어 학내외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또한 권한 없는 비대위가 소수의 폐쇄적인 운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학생들은 관례상 학생회가 없어도 축제나 행사는 비대위에서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리나 단대학생회 학교 측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축제의 개최를 단언할 수 없다. 또한 학사 행정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 개진이 어렵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선거의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많은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정작 투표에는 무관심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입후보자의 효능감 없는 공약이나 도덕성, 능력에 대한 불만을 투표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대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철저한 정치적인 무관심과 혐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를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할 때 우중은 잘못된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는 그동안 세계 각국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학내구성원으로서의 주권 의식을 행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바라기는 어렵다. 학생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비판은 내 권리를 보장하는 방법이고 선거는 그 시작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깨어있는 의식, 감사하는 시각,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할 때다.
제 741 호 [교수칼럼] 회독(回讀)
글을 의뢰받고 참고하라 안내해 주신 웹주소를 따라 이전 글들을 읽어보았다. 좋은 글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독자가 아니라 작자로서 글을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니 가볍게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누가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불현듯 ‘회독’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친다. 회독(回讀)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 가며 읽음. 회독(會讀) 여러 사람이 모여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연구하고 토론함. 어쩌다 보니 주위에 ‘회독’이라는 말이 익숙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멀게는 공직에 뜻을 뒀던 옛 친구들이, 가깝게는 교직에 뜻을 둔 학생들까지 ‘수험생’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전의 뜻풀이와는 달리, 한 사람이 거듭해서(回) 읽는(讀) 의미로도 ‘회독’이 쓰인다. 교과서 10회독 공부법, 통권 10회독 공부법, 막판 공부법 : 회독법과 정리, ... 아닌가 다시 확인해 보니 연관 검색어로 ‘공부’가 눈에 띈다. 사실 거듭해서 읽는 행위는 그리 낯선 행동은 아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시험, 발표라는 행위들은 ‘회독’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과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시험 범위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발표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기 위해 거듭거듭 다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험, 발표란 제한된 기간 내에 일정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회독’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행위라고 평가할 만할 것이다. 만족할 만한 결과라 평가하려면 ‘자기 만족감’, ‘사회적 인정’ 등의 조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독’이라는 표현으로는 낯설지 몰라도 거듭해서 무언가를 하는 행위는 그리 낯설지 않다. 러닝, 클라이밍 등에서 코스를 완주하고 완등하는 것은 동호인들이 거듭해서 시도하여 얻은 만족할 만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면 동호인들은 성과를 얻기 위해 몇 ‘회독’이나 할까. ‘동호인’과 ‘회독’이라니, 이 어색한 조합. ‘동호회’라는 단어가 주는 ‘자발성’이 ‘회독’의 의무감과 이질적이어서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든다. 혹 달디단 밤양갱이 있으니 ‘회독’의 의무감을 이겨내 보자는 이야기로 흘러간다는 의심을 사는 건 아닌가 괜한 걱정도 해 본다. 회독이든 아니든, 의무감이 수반되든, 재미가 따르든 거듭한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5km 완주자는 10km, 20km 완주를 도전하고, 15m 완등자는 30m, 40m 완등을 도전하는 모습은, 수험생이 5회독, 10회독을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기를 보내며 이런저런 ‘회독’으로 지쳐 있는 나에게, ‘쉼’이라는 ‘회독’이, 그리고 갱생을 도모할 ‘방학’이라는 ‘회독’이 머지않았음을 되새겨 보시길. 아니라고는 했지만 결국 어디선가 들었음 직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이야기로 주의를 환기하는 것 또한 아닐까. 글을 맺으려다 문득, 이 글의 난삽함에 편집자는 회독을 강제당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국어교육과 오민석 교수
제 741 호 [책으로세상보기] 죽은 언어로 보는 이 세상은
제 740 호 조커 : 폴리 아 되
조커 : 폴리 아 되 ▲ 폴리 아 되 포스터 (사진: 곽민진 기자) 조커 : 폴리 아 되, 2019년에 개봉한 《조커》의 후속작으로 조커 시리즈 전작이 꽤나 흥행한 터라 해당 작에 대한 많은 관심이 모였다. DC코믹스의 메인 악당이자, 유일무이한,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악 그 자체로 형상화되어 거대한 존재감과 팬덤을 가진 조커의 단독 시리즈 등장이기에 특히 기대에 부풀어 관람하게 되었다. 부제, 폴리 아 되(Folie deux)는 프랑스어로 '둘의(à deux) 광기(folie)'를 뜻하며, 정신의학 용어로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의미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같은 정신장애를 앓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영화에서 조커와 할리퀸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동시에, 조커와 그를 추종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루니 툰 워너브라더스 로고와 인트로 송과 함께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도입부가 특히 인상 깊었다. 아서와 아서의 그림자가 서로 진짜 조커가 되어 쇼에 나가기 위해 싸우는 내용으로, 아서는 중간에 그림자에게 조커를 빼앗기고 다시 조커가 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만 그림자는 조커가 되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무대에 오르고, 경찰이 찾아오자, 쇼를 실컷 즐긴 그림자는 조커를 다시 아서에게 되돌려준 뒤 도망친다. 아서는 그토록 원하던 조커를 되찾았지만, 그림자가 조커가 되어 한 짓까지 전부 뒤집어쓰는 바람에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그 와중에도 "똑똑" 농담을 치는 그를 확대하며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해 피가 범벅되면서 화면이 붉게 칠해지다가 커튼으로 거두어지면서 본 영화가 시작된다. 해당 도입부는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듯해 영화 시작 후, 영화가 끝난 뒤 모두 다시 해석해 볼 여지가 남아있다. 해당 영화의 연출들 곳곳이 제법 미감을 잘 살려냈는데, 뮤지컬 형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요소를 도입한 점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들의 광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선 효과적인 장치일 수 있지만, 후반부에는 오히려 집중이 어렵게 하는 듯해서 개인적으로는 불호였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조커, 소시민 사이에 혼란스러워하는 아서의 비참한 최후와 비정하고 혼란 속에서 광기만을 추앙하는 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허무하게 비정한 사회에 두들겨 맞고 몰락한 아서라는 볼품 없는 남자가 ‘조커’라고 형상화되기에는 기존 팬들의 기대와는 상충적이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관객이 기대한 것 역시 완전무결한 악, 혼돈 그 자체로, 우리 역시 영화 속 흥분한 군중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은 듯해 입맛이 씁쓸하기도 했다. 사회의 혼란과 경멸, 외면이 만들어낸 거대한 악, 혼돈 그 자체의 형상화였던 조커라는 캐릭터를 또 다른 관점에서 관객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줘 흥미로운 영화였다. 곽민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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